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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김부식, 삼국사기를 편찬한 고려의 문신

by 금융지식·IT 트렌드랩 2025. 8. 11.

김부식, 삼국사기를 편찬한 고려의 문신

 

김부식은 고려 인종 시기 대표적인 정치가이자 학자로, 우리 역사상 가장 오래된 현전 정사(正史)인 『삼국사기』의 편찬자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김부식의 삶과 업적은 단순히 역사서 편찬에만 머물지 않고, 고려의 정치 운영과 사상사 전반에 깊이 스며 있습니다. 오늘은 김부식이 어떤 인물이었으며, 그가 남긴 『삼국사기』가 후대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김부식

가문과 성장 배경

 

김부식(1075~1151)은 경주 김씨 가문 출신으로, 신라 왕족의 후예라는 자부심이 강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고려 초기부터 관직에 나아가 명성을 쌓았으며, 문벌 귀족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유학 경전에 통달했고, 한문 문장에도 뛰어났던 그는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진출했습니다.

 

특히, 김부식은 유학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한 정치관을 확립했으며, 불교가 주도하던 당시 사회에서 유교적 질서와 왕권 강화를 중시하는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이는 훗날 그의 정치 활동과 『삼국사기』의 역사관에도 뚜렷하게 반영됩니다.

 


 

고려 정치의 핵심 인물로

 

김부식은 인종 시기에 급격히 부상했습니다. 그는 한림학사, 대제학 등 문한직을 거쳐 재상에 이르렀으며, 고려의 대외·대내 정책 결정에 핵심적으로 관여했습니다.

 

그가 역사 속에서 특히 주목받는 계기는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 진압입니다. 묘청과 서경 세력은 불교·풍수사상을 기반으로 서경 천도를 주장하며 개혁을 시도했지만, 김부식은 이를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반대했습니다. 결국 1135년, 그는 군사를 이끌고 서경을 진압하여 개경 중심의 정치 질서를 유지했습니다. 이 사건은 후대 사가들로부터 ‘묘청의 난’으로 기록되며, 유교 중심 문벌 귀족과 불교 기반 지방 세력 간의 갈등을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이 되었습니다.

 


 

『삼국사기』 편찬의 의의

 

김부식의 가장 큰 업적은 1145년에 완성된 『삼국사기』입니다. 고려 인종의 명으로 편찬된 이 책은 신라, 고구려, 백제의 역사를 본기(本紀), 열전(列傳), 지(志), 표(表)의 사서 형식으로 정리한 정사입니다.

 

『삼국사기』는 단순한 역사 기록을 넘어, 유교적 통치 이념을 반영한 역사서라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김부식은 역사 속 인물과 사건을 평가할 때 충(忠)과 효(孝), 그리고 예(禮)를 중시했으며, 도덕적 교훈을 전달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이는 고려 왕실과 관료들에게 정치적, 도덕적 지침을 제공하기 위한 의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신라 중심의 서술 경향이 강하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는 김부식이 신라 왕족 후예라는 점, 그리고 당시 개경 귀족 사회의 시각이 반영된 결과로 해석됩니다.

 


 

보수적 정치관과 비판

 

김부식은 정치적으로 보수적이고 왕권 중심의 질서를 중시했습니다. 그는 지방 세력의 발호나 불교 세력의 과도한 영향력을 견제하며, 유교 중심의 정치 운영을 강화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개혁을 지향한 세력과의 충돌을 불러왔고, 특히 묘청의 난 진압 이후 그는 보수 귀족의 상징적 인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그가 고려 정치의 개혁 가능성을 저해했다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국가 체제의 안정을 유지한 공로 역시 인정합니다.

 


 

말년과 사후 평가

 

김부식은 재상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며 생을 마감했습니다. 사후에도 그는 고려 지식인 사회에서 존경과 비판을 동시에 받았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삼국사기』의 편찬자로서 더욱 높이 평가되었습니다.

 

그의 업적은 한국 역사학의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삼국사기』는 오늘날까지도 삼국시대를 이해하는 핵심 사료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비록 그의 역사관과 정치 노선에 대한 논쟁은 지속되지만, 김부식이 남긴 학문적·정치적 유산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역사 속 김부식의 의미

 

김부식은 고려의 정치 안정과 왕권 강화를 위해 평생을 바친 문신이자, 우리 고대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역사학자였습니다. 그는 유교적 가치를 토대로 한 정치 운영과 사서 편찬을 통해 후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묘청의 난과 『삼국사기』라는 두 축을 통해 그 이름을 역사에 남겼습니다.

 

그가 남긴 기록과 사상은 오늘날에도 많은 연구자들에게 중요한 탐구 대상이 되고 있으며, 한국 고대사 연구의 초석으로 평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