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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최만리, 세종의 개혁을 막으려 한 직언가의 삶

by 금융지식·IT 트렌드랩 2025. 8. 12.

최만리, 세종의 개혁을 막으려 한 직언가의 삶

 

조선 초기 정치사에서 최만리는 세종대왕과의 팽팽한 논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입니다. 최만리는 뛰어난 학문과 강직한 성품을 지녔으나, 그의 이름을 역사에 길이 남긴 사건은 바로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 반대 상소였습니다. 그러나 그를 단순히 ‘한글 창제를 반대한 인물’로만 기억하는 것은 그의 전체 삶을 축소시키는 일입니다. 오늘은 최만리의 생애와 업적, 그리고 그가 남긴 역사적 의미를 2500자 이상으로 깊이 있게 살펴보겠습니다.

 


 

최만리

학문과 절의를 갖춘 관료 최만리

 

최만리는 고려 말, 조선 초의 과도기에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성리학을 깊이 연구했으며, 유교 경전에 정통한 학문적 실력을 인정받았습니다. 조선 건국 이후 과거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갔고, 예문관, 집현전 등 학문과 정책 자문을 담당하는 핵심 부서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는 주자학적 가치관을 철저히 지키며 조선의 정치·사회 질서를 안정시키는 것을 중요한 목표로 삼았습니다. 특히 예(禮)와 명분을 중시했고, 외교에서는 명나라와의 사대 관계를 굳건히 하는 것을 국가 운영의 근간으로 보았습니다.

 


 

세종과의 역사적 충돌 – 훈민정음 반대 상소

 

1443년, 세종은 백성들이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는 새로운 문자, 훈민정음을 창제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반포하기 전, 여러 신하들과 의견을 나누었는데, 최만리는 강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1444년 그는 훈민정음 반대 상소를 올리며 세 가지 핵심 주장을 펼쳤습니다.

 

  1. 중국과의 외교 문제
  2. 조선은 명나라와의 외교에서 한자를 공식 문자로 사용하고 있었기에, 새로운 문자를 만들면 ‘중국의 문화를 거부하는 행위’로 비칠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이는 국제 관계에서 불필요한 마찰을 불러올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3. 유교 경전 해석 문제
  4. 한자는 오랜 세월 축적된 성리학과 유교 경전의 그릇이었기 때문에, 이를 대체하는 문자를 만들면 고전 해석과 학문 전통이 훼손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5. 사회 혼란 가능성
  6. 백성이 쉽게 글을 배우면, 오히려 법과 제도를 무시하는 자들이 늘어날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문자 해독 능력이 일반화되면, 불온한 문서와 사상도 확산될 수 있다는 보수적 관점이었습니다.

 

세종은 그의 의견을 끝까지 경청했지만, “백성을 가르치고 그들과 소통하는 것이 곧 왕도정치”라며 훈민정음 창제를 강행했습니다. 이 사건은 조선 정치사에서 왕권과 신권의 충돌, 그리고 개혁과 보수의 갈등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남았습니다.

 


 

직언을 중시한 정치관

 

최만리의 상소는 단순한 반대가 아니라 ‘유교 질서 수호’라는 명분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당시 왕의 결정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은 정치 생명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일이었지만, 그는 이를 감수했습니다. 그의 성품은 권력 앞에서도 굽히지 않았고, 자신의 학문적 신념을 끝까지 지키는 모습이었습니다.

 

그의 정치관은 ‘군주와 신하의 역할 분리’였습니다. 왕은 이상적인 정치를 펼치되, 신하는 옳다고 믿는 바를 거침없이 말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이 때문에 그는 ‘직언의 상징’으로 평가받기도 했습니다.

 


 

훈민정음 반대 이후의 삶

 

훈민정음 반대 사건 이후 최만리는 정치적으로 불이익을 받았고, 한동안 요직에서 멀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완전히 몰락하지 않았습니다. 세종은 그의 학문적 능력과 성실함을 여전히 인정했고, 다른 분야에서의 행정과 교육 업무를 맡겼습니다.

 

그는 지방관으로 부임하여 향촌 사회의 유교 교육을 강화했고, 후학 양성에도 힘을 쏟았습니다. 말년에는 중앙 정치에서 점차 물러나 학문 연구와 제자 교육에 전념했습니다.

 


 

역사 속 평가 – 보수주의자 vs 소신 있는 신하

 

최만리를 바라보는 평가는 엇갈립니다.

 

  • 비판적 시각: 시대 변화를 읽지 못한 보수주의자로, 훈민정음이라는 위대한 발명을 막으려 했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 긍정적 시각: 권력 앞에서도 직언을 멈추지 않은 충신으로, 조선의 신권 전통을 지키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의 강한 반대가 오히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명분을 더 분명히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세종은 최만리의 반대를 반박하며 훈민정음의 필요성을 구체적으로 설명했고, 이는 오늘날까지 귀중한 역사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최만리의 역사적 의미

 

최만리의 존재는 조선 정치 문화의 깊이를 보여줍니다. 절대 권력을 가진 세종이 반대 의견을 묵살하지 않고 논의했다는 점, 그리고 신하가 끝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는 점은 당시의 정치 체제가 단순한 전제왕권이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훈민정음을 반대한 인물로 역사에 남았지만, 동시에 학문과 명분, 외교 질서를 중시한 관료였습니다. 결과적으로 그의 반대는 한글 창제의 역사적 의의를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