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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최영, 고려 말 충신이자 마지막 장군의 길

by 금융지식·IT 트렌드랩 2025. 8. 19.

최영, 고려 말 충신이자 마지막 장군의 길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이 짧은 한마디는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청렴함과 절개를 상징하는 말로 남아 있다. 그리고 이 말을 남긴 주인공이 바로 최영이다. 그는 고려 말의 명장(名將)으로, 외침과 내부의 혼란 속에서도 조국을 지키려는 의지로 싸운 충절의 표상이었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은 권력 다툼에 희생된 비극이기도 했다. 최영은 왜 지금까지 기억되어야 하는가. 그의 생애를 따라가 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최영

고려의 마지막 명문가 장군으로 태어나다

 

최영은 1316년(충숙왕 3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무반(武班)으로서 고려 조정에서 활동한 명문가였다. 어려서부터 문무를 겸비했으며, 특히 병법과 활쏘기에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그는 134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군경력을 쌓기 시작했으며, 홍건적의 침입, 왜구의 침탈, 공민왕의 반원 정책 등으로 어지러웠던 고려 말 군사적 위기 상황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그의 성품은 검소하고 청렴했으며, 사치를 멀리한 것으로 유명했다.

 

최영이 말한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은, 진주에서 금을 발견하고도 나라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며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겠다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의 성격과 정치 철학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홍건적과 왜구를 막아낸 고려의 방패

 

14세기 중후반, 고려는 홍건적왜구라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홍건적은 원나라의 붕괴 속에 일어난 반란 세력이었고, 왜구는 일본에서 떠내려온 해적 무리들이었다. 최영은 이 두 세력을 상대로 모두 대승을 거두며 명장으로서 이름을 떨친다.

 

특히 1359년과 1361년 두 차례에 걸쳐 홍건적이 고려의 수도 개경을 침입했을 때, 최영은 이성계 등과 함께 이들을 격퇴했다. 백성들은 그를 “하늘이 보낸 구원자”라며 칭송했고, 조정에서도 그의 전공을 인정하여 고위 무관으로 발탁했다.

 

1363년 이후, 왜구 토벌 전쟁에도 앞장섰으며, 경상도·전라도·충청도 해안 지역의 왜구를 소탕해 백성의 생명을 지켜냈다. 이러한 활약으로 그는 고려 최후의 방패라 불릴 만큼 막강한 신뢰를 얻었다.

 


 

공민왕의 개혁을 지지한 무인

 

최영은 무신이었지만, 단순히 군사적 역할만 수행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공민왕의 반원 정책전제개혁, 권문세족 타파 등 개혁 정책에 깊이 공감했고, 이를 지지하며 함께 참여했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고려의 독립성을 회복하려 했고, 최영은 그러한 개혁을 뒷받침하는 무력적 실천자였다. 그는 권문세족과 결탁하지 않았고, 청렴하고 정직한 자세로 군권을 행사했다. 당시 부패한 귀족 사회에서 최영은 드문 존재였으며, 많은 백성들이 그를 존경했다.

 


 

위화도 회군과 최영의 비극적 최후

 

그러나 그의 생애는 영광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1388년, 고려 조정은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를 구실로 요동 정벌을 계획한다. 이 전쟁은 무리한 정치적 판단이었지만, 최영은 강경파로서 이를 지지하고, 부하 장수였던 이성계에게 출정을 명령한다.

 

하지만 이성계는 **“이 길은 조선의 길이 아니옵니다”**라는 판단 하에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수도 개경으로 돌아와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를 위화도 회군이라 부른다.

 

쿠데타 이후 최영은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 결국 사형당한다. 고려의 충신이자 명장이, 결국 새로운 조선을 연 인물에 의해 제거된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 72세. 생애 대부분을 나라를 위해 바친 이가 정치의 소용돌이에서 비극적으로 막을 내린 것이다.

 


 

최영이 남긴 정신과 오늘날의 의미

 

최영은 단지 무장(武將)이 아닌, 한 시대의 도덕과 신념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화려한 궁궐보다 전장에서 백성과 함께했으며, 재물보다는 명예와 의리를 중시했다.

그의 청렴은 현대에도 회자될 만큼 깊은 울림을 주고, 국가에 대한 충성심은 당시를 넘어 시대를 초월한 가치로 평가받는다.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도 세종은 “최영은 고려의 충신이었다”고 평하며 그를 모욕하거나 폄하하지 않았다. 이는 곧 최영이 얼마나 의로운 지도자였는지를 보여주는 단서다.

 

오늘날 파주에는 최영 장군 묘와 사당이 조성되어 있으며, 그의 유적지와 어록은 많은 이들에게 지도자의 덕목청렴의 가치를 되새기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