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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덕무, 책을 사랑한 조선 지식인의 초상

by 금융지식·IT 트렌드랩 2025. 8. 17.

이덕무, 책을 사랑한 조선 지식인의 초상

 

조선 후기, 권력과 명예보다는 지식과 내면의 수양에 몰두했던 한 사림이 있었다. 그는 높은 벼슬이나 장대한 업적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독서와 사유로 한 시대의 지식문화를 풍요롭게 한 조선의 ‘책벌레’였다. 이름은 이덕무,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실학자이자, 독서가, 문장가였다.

겉으로는 검소하고 유약해 보였지만, 그의 글에는 세상과 인간, 삶에 대한 깊은 통찰과 날카로운 지성이 살아 숨 쉬었다.

 


이덕무

서얼의 울타리를 넘어

 

이덕무는 1741년(영조 17년) 한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양반이었으나, 아버지가 서얼(庶孼: 첩의 자식)이었기 때문에 그 역시 중인 이하로 차별받는 신분이었다. 이 시기 조선 사회는 아직까지도 뿌리 깊은 신분제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이덕무가 과거 시험을 통해 벼슬길에 오르기란 쉽지 않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을 사랑했고, 가난한 살림살이에도 불구하고 책을 구해 읽는 데에 몰두했다. ‘나는 책 읽기를 가장 큰 즐거움으로 삼았다’고 고백했을 정도로 그는 독서광이었다. 실제로 이덕무의 호(號)인 **청장관(靑莊館)**도 ‘푸른 서재에 머무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그의 삶이 온전히 독서와 글쓰기에 바쳐졌음을 상징한다.

 


 

책을 읽는 삶, 사유하는 지식인

 

이덕무는 단순히 책을 많이 읽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책 속에 담긴 사상과 인간의 본성, 시대의 흐름을 끊임없이 분석하고, 자기 삶과 연결해 사유하였다. 그가 남긴 수많은 글 속에는 조선 지식인의 내면적 갈등, 불안정한 신분에 대한 성찰, 그리고 자기 성찰의 윤리학이 담겨 있다.

 

그의 대표작인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는 이런 사유의 집대성이며, 『책에 미친 바보(癡書生傳)』, 『간서치전(看書癡傳)』과 같은 글에서도 그의 독서에 대한 집착과 기쁨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덕무는 책 속에서 위로를 얻고, 자신의 존재를 확인했다.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되다

 

정조는 학문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진 군주였고, 유능한 실력자를 신분에 상관없이 발탁하고자 했다. 이러한 정조의 인재 등용 정책에 따라 이덕무는 1782년경, 왕립 도서관이자 학술기관인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발탁된다.

 

검서관은 단순히 책을 정리하는 직책이 아니었다. 조선 왕실이 보유한 수많은 서적을 분류하고 해석하며, 때로는 편찬에 참여하는 전문 지식인의 위치였다. 이 자리를 통해 이덕무는 정약용, 박제가, 유득공 등과 교류하며 실학적 사고를 더욱 확장해 나간다. 이들은 규장각 내에서 서로를 자극하고, 학문적으로 성장하며, 조선 후기 실학의 황금기를 이끌게 된다.

 


 

조선 후기의 일상과 정서를 기록하다

 

이덕무는 또한 섬세한 관찰력과 유려한 문체로 조선 후기 사람들의 삶과 감성을 기록한 작가이기도 하다. 『아정유고』, 『영처시고』 등에는 그가 일상 속에서 발견한 자연, 인간, 사회에 대한 감상과 단상이 담겨 있다.

 

그는 인간의 나약함, 겸허함, 때로는 허영심과 질투 같은 감정을 가감 없이 표현했다. 이는 당대 유교적 이상주의 글쓰기와는 다른, 진솔하고 인간적인 문학 세계였다. 글 속에 등장하는 그는 외로움을 느끼기도 하고, 자기 신세를 자조하면서도 끝끝내 책과 글을 놓지 않는다. 이덕무는 지식인의 이상을 겉으로 내세우기보다는, 삶 속에서 실천하고자 한 사람이었다.

 


 

세상의 빛을 좇지 않은 삶

 

그는 검소한 삶을 고집했고, 과한 권력이나 명예에는 관심이 없었다. 말년에 이르러서도 그는 오직 글을 읽고 쓰는 일에만 몰두했으며, 세상을 향해 자신의 학문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정조는 그를 아껴 규장각 서고를 자유롭게 드나들게 했고, 신분의 장벽을 넘어 그를 조정의 중요한 문신으로 키우려 했지만, 이덕무는 조용하고 낮은 자리에서 평생을 마쳤다.

 

그는 1793년 세상을 떠났고, 그의 유고와 글들은 후에 여러 제자들에 의해 정리되었다. 그의 삶은 말하자면 “평생을 읽고, 생각하고, 기록한 사람” 그 자체였다.

 


 

이덕무가 남긴 오늘날의 의미

 

이덕무는 조선 후기의 양반이 아닌, 신분제의 주변부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실천한 인물이다. 그는 권력이나 명예 대신, ‘지식 그 자체의 즐거움’과 ‘사유하는 인간의 고독’을 택했다.

 

그가 남긴 글들은 단지 고전문학의 한 장면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우리가 어떤 자세로 삶을 마주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색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격식보다는 진정성, 권위보다는 겸손, 성취보다는 태도를 중시했던 이덕무의 삶은 지금 시대에도 유효한 메시지를 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