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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최승로, 고려 초기의 길을 설계한 유교 정치가

by 금융지식·IT 트렌드랩 2025. 8. 17.

최승로, 고려 초기의 길을 설계한 유교 정치가

 

고려라는 새로운 왕조가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았던 10세기 후반, 나라의 제도와 방향을 바로잡기 위한 고민이 깊어지던 시기. 그때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고구려 유민의 후손이자 유학을 바탕으로 새로운 나라의 근간을 설계한 학자이자 정치가였습니다. 그 이름이 바로 최승로입니다.

 

최승로는 왕조 교체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조정의 중심에 서서, 유교 정치질서를 기반으로 한 국가 운영의 틀을 만들어갔습니다. ‘시무 28조’로 잘 알려진 그의 상소는 고려의 정치, 행정, 사상 체계를 정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으며, 이후 조선 정치사에도 긴 그림자를 드리우게 됩니다.

 

최승로

유학의 씨앗을 뿌린 집안에서 태어나다

 

최승로는 927년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이르는 혼란한 시기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조상은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신라에 귀화해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집안이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유교 경전에 능했고, 특히 공자의 정치 이념을 깊이 있게 받아들였다고 전해집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직후, 새로운 국가 체제를 세우는 과정에서 최승로는 빠르게 두각을 나타냅니다. 그는 유학자로서 단순한 학문적 성취에 머물지 않고, 정치 질서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에 깊은 관심을 두었습니다.

 

 

광종의 개혁과의 충돌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광종 집권기입니다. 광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던 군주였고, 노비안검법·과거제 시행 등은 후대에 긍정적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최승로는 광종의 개혁 방식이 지나치게 강압적이라며 비판했습니다.

 

특히 그는 광종의 전제 군주적 성향과, 지나친 숙청 정치가 신하와 백성들의 신뢰를 해친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광종 치하에서는 오히려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으며, 본격적으로 국정에 깊숙이 참여하게 된 것은 성종이 즉위한 이후였습니다.

 

 

시무 28조, 고려 정치의 나침반이 되다

 

최승로의 대표적 업적은 981년 성종에게 올린 상소문, 바로 시무 28조입니다. 이 문서는 단순한 건의문을 넘어, 고려 정치의 방향을 유교적 이상에 맞춰 재편하자는 종합적 제안서였습니다.

 

시무 28조에는 다음과 같은 핵심 사상이 담겨 있었습니다.

 

  • 불교 중심 통치에서 유교 중심 통치로 전환
  • 지방 호족 세력 견제 및 중앙집권 강화
  • 관료제도 정비와 과거제 운영의 공정성 확보
  • 절약과 검소함을 강조한 국정 운영
  • 공신과 외척 중심 인사에서 능력 중심 인사로의 전환

 

최승로는 불교를 전면 부정하지 않았지만, 지나치게 사원이 권력을 갖고 재산을 축적하는 것에는 분명한 경계심을 드러냈습니다. 그가 추구한 것은 유교의 질서와 절제, 도덕 중심의 정치였으며, 이는 고려가 오랜 불교 국가에서 벗어나 유교적 국가로 나아가는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었습니다.

 

 

성종의 신임과 제도 개편

 

성종은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수용하며 과감한 정치 개편을 단행합니다. 지방에 12목을 설치하고, 각 지방에 지방관을 파견해 지방 행정 체계의 기반을 마련했으며, 국자감을 중심으로 한 교육 제도를 정비했습니다. 유학 교육을 국가의 공식 이념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도 이 시기의 큰 변화입니다.

 

또한 음서제와 과거제를 병행해 인재를 선발하면서도, 불필요한 낭비와 권세의 남용을 억제하는 국정 운영에 나서게 되는데, 이 모든 변화의 배경에 최승로의 정치 철학이 있었습니다.

 

 

보수와 개혁 사이, 최승로의 명암

 

그러나 최승로의 사상이 전적으로 이상적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유교 이념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여성의 지위, 불교의 문화적 역할 등을 지나치게 억제하려 했다는 비판도 받습니다. 또한 공신 세력과 외척 세력을 견제하려 했던 그의 주장은 당시 고려 내부의 권력 균형을 흔드는 요소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대의 흐름을 읽고, 새로 등장한 고려 왕조에 ‘유교 국가’라는 이념적 토대를 심은 설계자로서 평가받습니다. 단순히 조정의 신하가 아닌, 국가 이념의 디자이너였던 셈입니다.

 

 

고려의 틀을 짠 설계자, 오늘날의 의미

 

오늘날 최승로는 조선시대 성리학 중심 사회의 원형을 만든 인물로도 평가됩니다. 그의 시무 28조는 고려뿐 아니라 후대 정치가들이 참고한 문서로 남았고, 조선이 유교국가로 전환하는 사상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는 지방 호족과 중앙의 권력 다툼이 첨예했던 시기, 합리적이고 제도적인 개혁의 모델을 제시한 정치가였고, 그가 그린 정치 구도는 단순한 이상론이 아닌, 실행 가능한 정책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특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