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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격동의 시기를 이끈 온화한 명군, 조선 제18대 국왕 현종 이야기

by 금융지식·IT 트렌드랩 2025. 8. 28.

조선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효종의 북벌이나 숙종의 환국 정치처럼 극적인 장면들에 집중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 사이, 혼란의 와중에서도 유연한 정치력과 온화한 리더십으로 나라를 안정시킨 군주가 있었으니, 바로 조선 제18대 국왕 **현종(顯宗, 1641~1674)**입니다. 그에 대한 기록은 상대적으로 적지만, 현종의 15년 재위기는 결코 가볍게 다룰 수 없는 치적과 품격의 시대였습니다.

외국에서 태어난 유일한 조선 국왕, 현종의 출생과 즉위

현종의 이름은 이원(李棩), 자는 **경직(景直)**입니다. 그는 1641년 청나라 심양의 봉림대군(훗날 효종) 관저에서 태어났습니다. 병자호란으로 인해 볼모로 잡혀간 인조의 아들 효종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조선 역사상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왕이라는 독특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효종이 즉위한 뒤, 현종은 1649년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1659년 아버지의 승하로 19세에 조선의 왕위에 올랐습니다. 정통 왕통 계승의 과정을 모두 거친 드문 사례로, 조선 중후기의 정치적 안정 기반을 제공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예송논쟁, 조선 정치사의 갈림길

현종 치세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바로 **예송논쟁(禮訟論爭)**입니다. 1차 예송은 현종이 즉위하자마자 발생했으며, 그 배경에는 효종의 위상을 ‘장자(長子)’로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차자(次子)’로 볼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서인은 효종을 장자로 보아 3년 상복을 주장했고, 남인은 인조의 차자이므로 1년 상복이 타당하다고 맞섰습니다. 결국 현종은 남인의 주장을 받아들였으나, 이는 정치적 갈등의 서막에 불과했습니다.

 

10년 뒤인 1674년, 현종은 모후 인선왕후가 승하하자 2차 예송논쟁을 겪게 됩니다. 이때는 오히려 서인의 주장을 받아들이며 효종의 위상을 높이고, 결과적으로 효종의 장자성을 인정하는 결정을 내립니다. 이는 단순한 예법 논쟁을 넘어 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조선의 정치 질서를 바로잡는 핵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민생 안정과 국가 재건을 위한 치적들

예송논쟁이 정치적으로 주목을 끌었지만, 현종은 민생과 국가 기반 정비에도 매우 적극적인 왕이었습니다.

1. 대동법 확대 시행

효종 대에 시작된 **대동법(大同法)**은 지방까지 확대되지 못한 한계가 있었는데, 현종은 이를 호남 지역까지 확대 적용하며 공납제도의 개혁을 실현합니다. 특히 경기선혜법을 대동법과 일원화하여, 경기 지역도 완전한 대동법 실시 구역으로 편입시킵니다. 이는 백성의 부담을 덜고 조세 체계의 근대화를 앞당긴 개혁으로 평가받습니다.

2. 동활자 주조와 경제 재건

현종은 **10만 개의 동활자(銅活字)**를 새로 주조하여 출판 및 행정 효율을 높였으며, 수리시설 확충양전사업도 실시하여 기초 농업 기반을 다졌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무너진 국력을 회복하려는 의지가 담긴 조치였습니다.

3. 기근과 전염병 속에서도 백성을 위로한 국왕

1660년대 후반, 조선은 **경신대기근(1670~1671)**과 이어진 전염병 창궐로 극심한 고통을 겪습니다. 이 시기 현종은 의창(義倉)을 활용하여 곡식을 방출하고, 온정을 담은 시정 방책을 통해 백성을 위로하려 힘썼습니다. 이는 전란 이후 피폐해진 조선 사회에 큰 위안을 주었고, 국왕으로서의 책임을 다한 중요한 장면이었습니다.

국방과 기술 발전에도 힘쓴 실용 군주

현종은 북벌의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점을 직시하고, 실질적인 국방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합니다.

  • 신기전 개량 및 군사훈련 강화
  • 온천 행차 시 군사 모의 훈련을 병행
  • 혼천의 개량, 자명종 제작에 대한 지원

이처럼 그는 북벌이라는 명분보다 실질적인 자강책을 통해 국방을 튼튼히 다진 현실주의 군주였습니다. 더불어 서양 문물과 과학기술에 관심을 두었던 부친 소현세자의 영향을 이어받아, 기술적 진보와 행정 효율에도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인간적인 국왕, 백성을 위한 리더십

현종은 정치가로서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면모에서도 깊은 인상을 남긴 군주입니다.

  • 어의 신가귀의 사형을 주장한 신하들을 말리고 공로를 인정해 교수형으로 감형
  • 불순한 말을 한 상궁에게도 관용을 베풀어 출궁만 시킴
  • 곰을 죽이지 말고 자연으로 돌려보내자고 건의한 일화

질병과 스트레스로 고통받는 가운데에서도 온천 치료로 건강을 돌보며 국정을 이어감

이러한 면모는 그가 공포나 강압보다 설득과 유연함으로 정치를 풀어나가려 했던 리더임을 보여줍니다.

 

조선 후기 안정기의 초석을 놓은 군주

현종은 1674년, 33세의 나이로 승하합니다. 그의 능은 **구리 동구릉 내 숭릉(崇陵)**에 있으며, 명성왕후 김씨와 함께 안장되었습니다. 정자각이 팔각지붕으로 된 특이한 구조로도 알려진 이 능은, 한 국왕의 조용하지만 단단한 치세를 기억하게 해주는 공간입니다.

 

그는 후궁 없이 한 명의 중전에게만 충실했으며, 사적인 삶에서도 검소하고 절제된 삶을 살았습니다.

평가와 재조명

현종은 오랫동안 심약한 군주, 정치에 휘둘린 임금으로 폄하되어 왔지만, 이는 사실과 거리가 있습니다. 그는 예송논쟁이라는 복잡한 정쟁을 무혈로 수습했고, 경제와 국방, 문화, 민생 정책을 고루 펼친 실용적 군주였습니다.

 

또한 아버지 효종의 명분을 지키고, 아들 숙종이 펼칠 강한 환국 정치를 위한 기반을 마련한 점에서, 조선 후기를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인물입니다. 그의 온화함 속 강단 있는 통치는, 정조나 영조가 펼칠 탕평책의 선례로도 평가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