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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 중기의 젊은 군주, 예종의 짧지만 굵은 통치 이야기

by 금융지식·IT 트렌드랩 2025. 8. 28.

왕권을 다지고 기틀을 닦다, 19세 군주의 정치적 유산

조선 500년 역사에서 가장 짧은 치세를 가졌지만 강한 인상을 남긴 군주가 있다면, 바로 **제8대 국왕 예종(睿宗, 1450~1470)**일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 세조의 강력한 왕권을 물려받고, 조카 성종에게 국가의 체계를 인계하기 전, 단 1년 3개월 동안 짧지만 굵직한 통치를 보여주었습니다. 오늘은 이 짧은 생애를 살다간 젊은 군주 예종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려 합니다.

세조의 아들에서 국왕으로, 예종의 즉위 배경

예종의 본명은 이황(李晄), 자는 명조(明照)입니다. 1450년, 세종의 아들 세조(수양대군)와 정희왕후 사이에서 태어났고, 본디 왕위 계승 서열에서 멀었습니다. 그러나 큰형 의경세자가 19세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세조는 손자보다는 아들인 예종을 후계자로 지명하게 됩니다. 이는 당시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가, 또 다른 소년 군주로 인해 벌어질 불안정한 정국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1468년, 세조는 예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 이튿날 세조가 승하하면서 예종은 본격적인 국정 운영을 시작하게 됩니다. 당시 나이 19세, 병약했지만 강한 정치적 의지를 갖고 있던 청년 군주의 등장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예종 통치의 핵심: 강한 왕권과 제도 정비

예종의 치세는 1년 3개월로 짧았지만, 통치의 방향은 분명했습니다. 왕권 강화, 법제 정비, 공신 세력 견제가 그의 핵심 노선이었습니다.

1. 《경국대전》 편찬 주도

가장 대표적인 업적으로 꼽히는 것은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 편찬 작업을 본격적으로 마무리한 것입니다. 예종은 재위 이듬해인 1469년, 육전 전체를 통합한 《기축대전》을 완성시켰고, 이는 후대 성종 대의 《경국대전》 반포로 이어졌습니다. 실제 조문 구성과 정비의 많은 부분은 예종 치세에 완료되었으며, 조선 통치 체제의 근간이 되는 법적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2. 공신 세력 견제와 왕권 강화

예종은 즉위 초부터 병조판서 남이를 의산군 겸사복장으로 강등시키며 경계했고, 이후 남이의 역모 고변 사건을 계기로 그를 처형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의심을 넘어서, 공신 세력이 국왕의 권위를 넘어서는 것을 막기 위한 예종의 강경한 정치 의지를 보여줍니다. 특히 남이처럼 세조 대 공신 출신이라도 그 위세가 지나치면 단호히 제어하려는 태도는, 아버지 세조의 왕권 철학을 계승한 모습이었습니다.

3. 한명회와의 대립

예종은 장인이자 권신이었던 한명회와도 수차례 충돌했습니다. 한명회는 성종 즉위 후 다시 정치 중심으로 복귀하지만, 예종 치세 당시에는 그의 전횡을 경계한 예종의 견제가 지속되었습니다. 이는 청년 군주가 권신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닌, 주체적으로 정국을 운영하려는 노력으로 평가됩니다.

병약했던 몸, 그리고 너무도 이른 죽음

예종은 태어날 때부터 지속적인 발병(족질)을 앓았고, 재위 중에도 건강이 나빴습니다. 즉위 직후에는 모후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실시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직접 정사를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과중한 업무와 고질병은 그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켰고, 1470년 초 갑작스럽게 승하했습니다.

 

당시 사망 직전까지도 문안과 보고를 소홀히 하지 않아, 신하들은 그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조선왕조실록』은 전합니다. 21세 생일을 앞두고 맞은 예종의 급사는 조정에 깊은 상실감을 안겼습니다.

 

현대 학자들은 지병 악화에 의한 패혈증 가능성을 제기하며, 염습 시 그의 시신이 변색되어 있었다는 기록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한편 일각에서는 정적에 의한 독살설도 제기되나, 결정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예종의 인간적인 모습과 기록되지 않은 정치 감각

예종은 역사적으로 ‘쪼잔한 왕’, ‘의심 많은 임금’으로 종종 그려지지만, 이는 남이 사건 하나에 기댄 왜곡된 시선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백성을 위하고, 정치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뛰어난 감각의 노력형 군주였습니다.

  • 그는 《경국대전》 정비에 직접 참여하며, 문장 수정과 항목 재배치까지 관여했습니다. 단순 명령이 아닌, 정치 개혁에 실질적으로 참여한 임금이었던 것입니다.

아버지 세조에게 ‘세조’라는 묘호를 올릴 때에도 왕실 내부의 반발을 무릅쓰고 강행했습니다. 이는 조선 왕조의 통치 정당성 문제와도 연결되며, 정통성보다는 실질적 통치 기반을 중요시했던 실용주의적 시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11세에 장순왕후에게서 장남을 낳았고, 이는 조선 국왕 중 가장 어린 나이에 부친이 된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 인성대군은 후손 없이 생을 마감하면서 예종의 직계는 단절되고 맙니다.

짧은 치세, 그러나 결코 작지 않은 업적

예종은 단명한 군주였지만, 왕권 강화를 위한 결단, 제도 정비의 실질적 성과, 권신 세력과의 균형 유지 등 정치적으로 결코 만만치 않은 군주였습니다. 《경국대전》의 편찬을 주도한 공로만으로도 그는 조선 정치 체계의 근간을 닦은 인물로 평가받아 마땅합니다.

 

그가 만약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세조보다도 백성을 위하는 선군(善君)으로서 더 많은 개혁을 시도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버지 세조와 아들 성종 사이의 다리로만 그를 기억하기에는, 예종이 남긴 흔적은 분명히 또렷하고 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