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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철종, 강화도령에서 조선의 왕으로: 비운의 군주가 남긴 짧은 흔적

by 금융지식·IT 트렌드랩 2025. 8. 28.

천한 신분과 가난 속에서 자란 왕자

조선 제25대 국왕 철종(哲宗, 1831~1864)은 조선 왕조 500년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반전을 이룬 인물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원래 그의 이름은 이원범(李元範)으로, 태어난 곳은 한성부 경행방(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일대)입니다. 전계대원군의 아들로 방계 혈통에 불과했던 그는, 어린 시절부터 권력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철종은 한때 정치적 위기에 휘말려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14세부터 약 5년간 그곳에서 은거했습니다. 강화도 시절 그는 나무를 해 생계를 유지하며 사람들로부터 ‘강화도령’으로 불렸습니다. 이런 이력 때문에 조선 후기 기록에는 그가 종살이까지 했다는 소문도 전해집니다. 그러나 이는 당시 민심의 동정과 안타까움을 반영한 이야기로, 실제로는 친족의 보호를 받고 비교적 자유로운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까막눈 왕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문맹은 아니었습니다. 《천자문》과 《통감》, 《소학》 일부를 학습한 기록이 있으며, 비록 제왕학을 제대로 교육받지는 못했지만, 기본적인 글읽기 능력은 갖추고 있었습니다.

 

철종

갑작스런 왕위 등극, 그리고 안동 김씨의 그림자

18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조정은 새로운 왕위를 둘러싼 고민에 빠졌습니다. 당시 조선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안동 김씨는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인물을 원했고, 그 결과 철종이 선택되었습니다. 순조의 양자로 입적된 그는 ‘변(昪)’으로 이름을 바꾸고 제25대 국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철종의 즉위는 외형적으로는 왕통을 잇기 위한 정통 절차였지만, 실제로는 안동 김씨의 의도에 따라 만들어진 정치적 연출이었습니다. 철종은 사실상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 왕이었고, 국정은 순원왕후와 김문근을 비롯한 외척들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도 철종은 민생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시도했습니다. 즉위 직후 설치한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은 전정, 군정, 환곡의 삼정을 바로잡고자 하는 취지였으며, 구체적인 실행 지침인 《삼정이정절목》을 제시했습니다. 이 같은 노력은 강화도에서의 삶을 통해 서민들의 고통을 직접 체험했던 그였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하지만 그는 권력이 없었고, 제왕으로서의 준비도 부족했기에 개혁은 얼마 지나지 않아 흐지부지되고 맙니다.

후사 없이 요절한 비운의 군주

철종은 철인왕후 김씨와 혼인했으며, 5남 6녀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유아기에 사망했고, 유일하게 장성한 자녀인 영혜옹주도 자식 없이 사망하면서 철종의 직계는 완전히 단절됩니다. 그는 조선 역사상 유일하게, 왕위에 있으면서 후사 없이 사망한 임금이자, ‘즉위 중 사망한 마지막 조선 국왕’이 되었습니다.

 

그의 말년은 정치적 무력감 속에서 조용히 흘러갔습니다. 실권을 장악한 외척의 틈바구니에서 무엇을 할 수 없었던 그는, 일부 기록에 따르면 술과 유흥에 빠졌다고 전해지기도 하지만, 이는 철종 개인의 타락이라기보다, 그의 의지가 외면받은 궁중의 절망적 현실을 상징합니다.

 

1864년, 철종은 창덕궁 대조전 별당에서 32세의 나이로 요절했습니다. 그의 무덤은 경기도 파주에 있는 예릉(睿陵)입니다.

철종의 어진과 구군복의 역사적 가치

1861년 제작된 철종의 어진(御眞)은 대한민국 보물 제149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당시 30세 철종의 모습을 담은 이 어진은, 구군복 차림의 모습을 담은 유일한 왕의 어진으로, 미술사적으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닙니다. 한국 전쟁 중 부산으로 피난 갔다가 1954년 화재로 절반이 소실되었지만, 남은 부분을 바탕으로 복원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어진은 권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군주의 고뇌와 함께, 조선 말기의 정치적 풍경을 간직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철종을 둘러싼 야사와 대중문화 속의 모습

철종은 그의 기구한 삶만큼이나 다양한 야사와 이야깃거리를 남겼습니다. 강화도 시절 사랑했던 하층민 여성 ‘양순’과의 이별, 즉위 후에도 강화도의 막걸리를 그리워했다는 이야기, 외숙부를 사칭한 인물 염종수를 혼내줬다는 일화 등은, 그가 군주의 자리에 앉기 전 한 명의 백성으로 살았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배경은 대중문화에서도 자주 다루어졌습니다. 영화 《강화도령》(1963),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 대원군》(1990), 《철인왕후》(2020) 등에서 철종은 종종 어리숙하지만 인간미 있는 인물로 묘사되며, 때로는 백성의 고통을 가장 잘 이해하는 군주로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특히 《철인왕후》에서는 그의 이미지를 새롭게 해석해, 개혁적인 성격과 진심 어린 통치를 시도했던 왕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조선 몰락기, 그 경계에 서 있던 인물

철종의 묘호 ‘철(哲)’은 ‘밝고 지혜로운’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철종이 그 의미에 걸맞은 정치적 성과를 남겼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그는 조선 후기 세도정치의 피해자이자, 구조적 한계를 온몸으로 받아낸 비운의 군주였습니다. 제왕의 교육을 받지 못하고 정치적 기반도 약했던 그였지만, 소외된 백성의 삶을 이해하고자 했던 의지는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그의 시대는 개혁의 길목이자, 몰락의 경계선이었습니다. 철종은 역사의 중심에서 스스로를 지켜내기 어려웠던 인물이지만, 조선 왕조의 마지막 균형점으로서 의미 있는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