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약한 황태자에서 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대한제국 제2대 황제이자 조선 왕조의 27대 군주로 기록되는 순종(純宗, 1874~1926). 그의 생애는 한 시대의 몰락과 맞닿아 있으며, 군주로서보다는 망국의 상징으로 기억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무기력한 황제’로 치부하기엔 그의 삶에는 격동의 시대를 조용히 견뎌낸 고통과 저항의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의 본명은 이척(李坧), 자는 **군방(君邦)**이며, 연호는 ‘융희(隆熙)’입니다. 공식 시호는 순종문온무녕돈인성경효황제(純宗文溫武寧敦仁誠敬孝皇帝)로, 줄여서 순종 효황제라 불립니다. 조선 왕실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제국 황제였기에 현대 학계에서는 그를 조선의 마지막 군주로 병기하기도 합니다.
조선 최연소 세자, 유년기의 그림자
순종은 1874년 창덕궁 관물헌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고종, 어머니는 명성황후입니다. 그는 고종의 유일한 적자였고, 조선 왕실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정실 소생 아들이었습니다. 불과 두 살이던 1875년에 조선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지만, 유년 시절은 잔병치레로 점철되었습니다.
천연두와 만성질환, 그리고 신체적 약화는 순종의 성장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무속에 의존하며 그의 건강을 회복시키려 했지만, 아이의 체질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이후로도 성인이 된 후까지 지속적인 건강 문제가 그를 따라다녔고, 이는 황제 재위 동안의 무기력한 이미지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비극의 전환점: 독살 미수와 신체 손상
순종의 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1898년 김홍륙 독살 미수 사건입니다. 러시아어 역관 김홍륙이 고종을 제거하고 정변을 일으키려는 시도에서, 고종에게 아편을 탄 커피를 내렸고, 고종은 이를 뱉어내며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러나 순종은 그 커피를 마신 뒤 피를 토하며 기절, 며칠 동안 혈변과 구토에 시달렸습니다.
이 사건은 순종의 치아 손실, 턱 관절 비대, 언어 장애, 성기능 저하 등을 남겼고, 이후 정신적 위축과 신체적 쇠약의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후계 문제에 대해 직접 언급할 만큼 자신의 상태를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를 정치적 부담으로 여겼습니다.
강제 즉위, 허수아비 황제가 되다
1907년, 일본의 압력으로 아버지 고종이 퇴위당하자 순종은 제2대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합니다. 그러나 이 즉위는 ‘양위’가 아닌 ‘섭정’을 명한 고종의 본뜻과는 어긋난 강제적 통치 전환이었습니다. 고종과 순종 모두 즉위식에 불참했고, 내관들이 대역을 맡는 촌극이 벌어졌습니다.
즉위 이후 순종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측 권신들의 장악 아래 놓였습니다. 입법, 행정, 외교, 군사권 모두를 일본에 넘긴 을사늑약(1905), 정미7조약(1907)에 이어, 결국 1910년 경술국치를 통해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에 완전히 병합됩니다. 순종은 이 과정에서 실질적인 발언권이나 결정권 없이 무력한 상징 군주로 존재했습니다.
망국 이후, 침묵 속의 저항
국권을 상실한 뒤 순종은 ’이왕(李王)’의 칭호로 격하되어 창덕궁에서 은거하게 됩니다. 그의 일상은 조용했지만, 작은 저항의 몸짓들은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 고종의 국장 당시 양복을 입은 조문객에게 등을 돌리며 절을 받지 않음으로써 일본식 복장을 거부한 사건은 유명합니다. 이는 일본 관리들까지 한복을 입게 만들었습니다.
- 창덕궁을 일본 황실 별궁으로 만들자는 이완용의 제안에 대해선 공공연한 자리에서 이완용을 질타하며 거절했습니다.
- **사망 직전 남긴 유조(遺詔)**에는 “한일병합은 본인의 의사에 반해 강제로 체결된 조약”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고, 이는 훗날 《신한민보》를 통해 국내외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점점 고립되었고, 아편에 의존하는 생활로 기력이 쇠약해졌습니다. 프랑스 요리를 유일하게 즐겼다는 기록 외에는 무기력하고 무표정한 군주의 모습만이 주변에 남았습니다.
사망과 조선 왕조의 마침표
1926년 4월 25일, 순종은 52세의 나이로 창덕궁에서 서거합니다. 그의 죽음은 고종의 죽음과 함께 3·1운동의 직접적 계기로 여겨지며, 식민지 조선의 민중에게는 슬픔이 아닌 분노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그의 묘는 **경기도 남양주 유릉(裕陵)**에 조성되었으며, 아내 순명효황후 민씨, 순정효황후 윤씨와 함께 조선왕조 유일의 3인 합장릉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는 순종이 조선 왕실의 마지막 왕이자, 마지막 제왕으로서 상징적으로 위치 지워진 장소이기도 합니다.
한 시대의 끝과 남겨진 인물
순종은 대개 ‘무기력한 허수아비 황제’로 평가받습니다. 실제로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한 기록은 거의 없고, 일제와 친일 내각의 꼭두각시로서 존재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의지조차 없었던 인물이라는 판단으로 연결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병약했고, 성인이 된 이후에는 독살 미수와 지속적인 신체 손상, 후계 압박, 그리고 일본의 철저한 감시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처했던 순종은, 그저 시대의 희생자였다고 평가할 여지도 있습니다.
최근 들어 순종이 지방 순행에서 근대식 교육을 위한 사비 기부를 했다는 점이나, 궁궐을 최초로 일반에 개방하고 근대 문화유산을 남긴 점 등에서 새로운 평가가 시도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순종황제 어가길 조성 사업이 친일 미화 논란으로 철거되는 등, 그의 역사적 역할에 대한 사회적 평가는 여전히 논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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