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2대 국왕, 정종의 삶을 다시 보다
조선을 창업한 태조 이성계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정종(定宗, 1357~1419) 은 일반적으로 조명을 덜 받는 왕입니다. 왕위에 올랐으나 실권은 동생 이방원(태종)이 쥐고 있었고, 재위 기간도 불과 2년 남짓. 그러나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무장이자 충직한 아들이었으며, 가족을 아끼고 권력을 탐하지 않았던 평화주의적 군주의 면모가 드러납니다.
그의 이름은 본래 이방과(李芳果), 즉위 후에는 이경(李曔) 으로 개명했습니다. 그의 묘호인 ‘정종’은 1681년 숙종 대에 가서야 추증되었으며, 그동안 다른 왕들에 비해 낮은 예우를 받아왔습니다.
아버지 이성계를 닮은 무장의 삶
정종은 1357년, 함흥에서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 한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첫째 형 이방우는 일찍 요절했고, 정종은 사실상 장남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왜구 토벌에 나서며 황산대첩 등 전장에서 수차례 공을 세웠습니다.
그는 단순한 군사 수행자에 그치지 않고, 위화도 회군 이후의 조선 개국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동생 이방원이 정몽주 제거를 계획할 당시 이를 묵인하고, 공양왕에게 정몽주의 죽음을 통보하며 정치 전면에 나섰습니다. 이 같은 모습은 그가 군사적 감각뿐만 아니라 정국 구도를 판단할 능력도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제1차 왕자의 난과 즉위
1398년, 정도전과 이방석 세력을 제거한 제1차 왕자의 난은 조선 초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정치적 전환점이었습니다. 주도자는 셋째 동생 이방원이었고, 정종은 이 와중에 왕세자로 옹립되어 곧바로 태조로부터 선위를 받습니다. 그러나 이는 형식적 계승에 불과했고, 실권은 이방원에게 집중된 상태였습니다.
즉위한 정종은 정치적 야심보다는 안정을 택했습니다. 그는 왕세자 자리에 이방원을 세우면서 “아우지만, 내가 직접 아들로 삼겠다”며 형제 간의 피비린내 나는 분쟁을 스스로 차단합니다. 또한 혼란의 진원지가 되었던 한성 대신 개경으로 환도하는 결정을 내려 정국 안정을 도모했습니다.
상왕이 된 후의 삶, 효와 우애의 상징
1400년, 정종은 제2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동생 이방원에게 왕위를 양위합니다. 상왕으로 물러난 뒤에는 불교와 격구, 온천을 즐기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권력을 쥐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태종에게는 조언자이자 정신적 지주로 남았습니다.
정종의 효심과 형제애는 조선 왕실 역사에서 보기 드물 정도로 깊었습니다. 태조가 불편을 호소하자 시위 군을 철수시켰고, 태종이 후궁을 들이려 하자 “나는 적자가 없어도 새 장가를 들지 않았다”며 간곡히 만류하기도 했습니다. 형제 간의 우애는 눈이 올 때 서로 약이라며 눈을 보내 장난을 치던 일화에서도 엿보입니다.
무예와 기골, 그리고 사적인 삶
정종은 체격이 크고 강건해 “곰처럼 생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사냥과 격구에 능했고, 불교에도 심취해 조용한 종교적 생활을 즐겼습니다. 그는 두 명의 왕비와 여러 후궁을 두었고, 자녀도 많았으나 모두 서출이었습니다.
특히 정안왕후 김씨와는 깊은 애정을 나눴으며,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왕실의 연회를 중단하고 애도를 표했습니다. 후궁 중 기생 출신인 기매가 낳은 자식을 인정하지 않았고, 자식을 사칭한 자가 나왔을 때도 끝까지 부정하면서도 살생은 피했습니다. 이는 정종 특유의 온건함과 자비로운 성정을 드러냅니다.
사후 대우와 역사적 재평가
정종은 1419년 10월, 62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 태조와 함께 장수한 몇 안 되는 조선 군주 중 하나였고, 그의 능인 후릉은 현재 북한 개성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러나 정종은 사망 후에도 정치적 평가에서 오랫동안 소외된 인물이었습니다. 태종과 세종이 그의 묘호와 시호를 미루면서, 오랜 세월 동안 왕으로서 제대로 된 예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용비어천가」에서도 제외되어 ‘조선 왕통’의 구성에서 빠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숙종 대에 들어 정종이라는 묘호가 내려졌고, 시호에도 ‘의문장무’ 등의 칭호가 추가되며 비로소 조선 왕실의 정통 국왕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그가 설치한 집현전은 훗날 세종대왕의 학문 제도 기반이 되었으며, 이는 정종의 통치가 단순히 형식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가족을 지키고, 피를 멈추다
정종은 조선 초기 피의 숙청과 골육상쟁이 난무하던 시대 속에서 스스로 욕망을 거두고 평화를 택한 왕이었습니다. 강한 무인으로 성장했지만, 권력 다툼에서 한발 물러서고 형제 간의 화합을 우선시했던 그의 선택은 조선 왕조의 내부 균열을 봉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재위는 짧았지만, 상왕으로서의 존재감은 길었고, 무인의 기개와 성군의 덕목을 동시에 갖춘 인물로 평가받을 여지가 충분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정종을 통해 권력이 아닌 덕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한 왕의 조용한 위대함을 다시금 되새겨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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