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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종, 격동의 시대를 이끈 대한제국의 황제

by 금융지식·IT 트렌드랩 2025. 9. 4.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고종의 이름에 담긴 역사

조선 제26대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高宗, 1852~1919)**은 조선 왕조의 마지막 국왕이자, 근대 국가로의 전환을 시도했던 군주로 기억됩니다. 태어날 당시 이름은 **이명복(李命福)**이었고, 나중에는 **이재황(李載晃)**으로 불렸습니다. ‘개똥이’라는 속칭은 부모가 자식을 병이나 재앙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일부러 붙이는 이름이었으며,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왕위에 오른 후 고종은 **형(㷗)**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며, 이는 양부 문조세자(익종)의 이름에서 ‘火’ 부수를 따온 이름이었습니다. 흔히 일본 제국 시기의 문서에서는 ‘희(熙)’로 적히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 개명 기록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시호는 조선의 국왕과 대한제국의 황제로서의 위엄을 모두 담아 매우 장황하게 기록되었고, 이는 광무 황제, 고종 황제, 또는 고종 태황제라는 명칭으로 간략히 불리기도 합니다.

고종

왕이 된 소년, 흥선대원군의 아들

고종은 1852년 9월 8일, 서울에서 태어나 1863년 12세의 나이로 즉위했습니다. 당시 조선은 철종의 후사가 없어 방계 혈통이었던 고종이 순조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아직 어린 나이였던 고종을 대신해,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맡으며 실권을 행사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집권 초기에 경복궁 중건, 서원 철폐, 비변사 폐지, 호포제 시행 등 강력한 개혁 정치를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천주교 탄압과 외세 배척 정책은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 등 외국과의 무력 충돌로 이어졌고, 점차 국정 운영에 한계를 드러냅니다.

 

이후 고종은 친정을 선언하고 흥선대원군을 정치에서 배제했지만, 대신 권력을 쥔 이는 왕비 명성황후 민씨였습니다. 민씨 일가는 조정을 장악해 세도 정치로 변질되었고, 조선은 다시금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서양 문물의 수용자, 조선의 얼리어답터

고종은 조선 군주 중에서도 서양 문물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았던 인물입니다. 사진, 커피, 자동차, 피아노, 심지어 에스페란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그의 선구적인 취향이 나타났습니다.

 

  • 사진 촬영: 고종은 조선 왕들 중 최초로 사진 촬영에 적극적이었습니다. 1884년 창덕궁 농수정에서 찍힌 사진은 그의 첫 사진으로 알려져 있고, 1905년에는 한국인 사진사 김규진이 촬영한 고종의 초상 사진이 남아 있습니다.
  • 자동차와 피아노: 고종은 다임러 리무진과 캐딜락 차량을 도입해 사용했으며, 독일제 피아노를 관립한성중학교(현 경기고등학교)에 하사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당시로서는 놀라운 근대화의 상징이었습니다.
  • 커피 애호가: 고종은 커피를 ’가히차(珈琲茶)’라고 부르며 즐겼습니다. 김홍륙이 독살을 시도했을 때, 커피 맛이 이상하다는 이유로 뱉어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2017년 창덕궁에서 발견된 와플 틀과 카스텔라 틀은 그가 커피 타임에 서양식 디저트를 곁들였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 에스페란토 학습: 그는 에스페란토를 학습한 최초의 군주로 기록되기도 합니다. 당시에는 국제 언어로서 촉망받던 시기였으며, 고종은 미래를 위한 준비 차원에서 이 언어에 관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 도량형 통일: 1894년에는 국제 미터 원기와 킬로그램 원기를 도입해 조선의 도량형 통일을 시도했습니다. 이는 국제 표준을 채택한 매우 이른 시도로 평가됩니다.

 

이러한 고종의 선진적 감각은 문화재와 유물, 시사 만평 등 다양한 시각자료로 남아 있으며, 이는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넘어가는 시대 변화의 증거이자, 고종 개인의 철학을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대한제국의 탄생, 그러나 이어진 굴욕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에게 살해되는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합니다. 이후 왕권 회복과 자주 독립을 목표로, 1897년 국호를 ‘대한’으로 바꾸고 대한제국을 선포, 황제로 즉위합니다. 이 시기의 연호가 **광무(光武)**였기에, 고종을 ‘광무 황제’로 부르기도 합니다.

 

광무개혁은 절대군주제를 바탕으로 제도적 개혁을 시도한 것으로, 원수부 창설, 법전 편찬, 관제 정비 등이 추진되었습니다. 하지만 내부 부패와 외세의 간섭으로 인해 실질적 효과를 거두기 어려웠고, 일본의 영향력은 점점 더 조선을 잠식해 들어옵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자, 고종은 몰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해 일본의 침략을 국제사회에 호소했습니다. 하지만 열강의 외면 속에 고종은 오히려 일본의 압박으로 1907년 강제 퇴위당하고, 아들 순종이 황위를 계승하게 됩니다.

생의 끝, 그리고 남겨진 유산

1907년 퇴위 이후 고종은 ‘태황제’로 불리며 덕수궁에서 사실상 유폐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1919년 1월 21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갑작스럽게 붕어합니다. 독살설이 제기될 만큼 고종의 죽음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이는 바로 이어진 3·1운동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의 묘는 황후 명성황후와 함께 **홍릉(서울 동대문구 청량리 인근)**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고종은 사진과 그림, 유물로 많은 자료를 남긴 유일한 조선 군주이며, 조선 왕조와 대한제국, 그리고 일제 강점기라는 세 시대를 모두 살아낸 독특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고종에 대한 재평가

고종은 오늘날까지도 역사적으로 다양한 평가를 받는 인물입니다. 일부는 그를 우유부단한 군주, 미숙한 외교가로 비판하지만, 또 다른 시각에서는 그는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고 자주 독립을 추구하려 했던 근대화의 선구자로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그가 추진한 광무개혁과 근대화 시도는 비록 미완에 그쳤지만, 조선이라는 봉건국가가 근대 국가로 나아가려는 마지막 노력의 산물이었습니다. ‘고종 황제’라는 이름은 바로 그 시대의 혼란과 열망, 좌절을 함께 품고 있는 상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