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가 점차 쇠퇴하던 하대(下代)의 혼란 속에서, 국정을 수습하고 왕권을 강화하며 통치 기반을 재정비한 군주가 있었습니다. 바로 신라 제38대 왕,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9)**입니다. 짧지 않은 14년간의 재위 기간 동안 그는 왕실 권위 회복, 행정 개혁, 유교적 통치 기반 마련 등 다양한 업적을 이루며 신라 하대 정치의 초석을 다졌습니다.
왕이 되기까지: 파란만장한 즉위 배경
원성왕의 본명은 **김경신(金敬信)**으로, 태종 무열왕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출생 연도는 명확하지 않지만, 그의 증손자가 788년생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즉위 당시 이미 고령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780년 혜공왕이 피살되며 김지정의 난이 일어났을 때, 김경신은 이찬(伊飡)의 지위에서 상대등 김양상(후일 선덕왕)과 함께 난을 진압하는 데 큰 역할을 했고, 이후 상대등에 오르며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선덕왕 사후,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려 했으나 홍수로 회의에 불참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김경신이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올랐습니다. 일부 사서에서는 그가 먼저 궁궐에 들어가 왕위에 오른 사실을 강조하며 권력 의지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독서삼품과의 시행: 유교 정치 기반 확립
원성왕의 가장 대표적인 업적 중 하나는 788년에 시행된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입니다. 이는 유교 경전의 독해력을 기준으로 인재를 선발한 제도로, 고대 동아시아 국가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유교 관료제의 기반을 마련한 사례로 평가받습니다.
독서삼품과는 신라의 국학 교육 체계 강화, 학문 장려, 실력 기반의 관리 등용이라는 점에서 획기적인 제도였습니다. 비록 실질적인 운영에 있어 한계가 있었지만, 신라 사회의 이념적 전환과 문치주의 확산을 상징하는 중요한 정책으로 남아 있습니다.
왕권 강화와 조상 숭배의 정치화
원성왕은 즉위 후 왕실 중심의 정치권력 재편에 힘썼습니다. 그는 경덕왕, 성덕왕 등 전왕들의 사당을 철폐하고, 자신의 조상인 흥평왕, 명덕왕의 사당을 세워 이들을 내물왕, 무열왕, 문무왕과 함께 국가 5묘로 지정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직계 가계를 신라의 중심 왕통으로 격상시키고, 귀족들의 세력을 견제하려는 의도로 해석됩니다.
또한 부모와 조부의 사당을 국가적 차원에서 기리는 동시에, 기존 왕가의 영향력을 희석시키려는 정치적 계산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러한 조상 숭배의 정치화는 후대 신라 왕들의 통치 방식에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민생 안정과 농업 진흥
즉위 초기 흉작과 기근으로 어려움을 겪는 백성들을 위해 원성왕은 6만 석의 곡식을 풀어 구휼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이는 민심 안정에 큰 역할을 했고, 왕권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벽골제(碧骨堤)의 증축을 통해 농업 기반을 강화하고 수리 시설을 정비하는 등 백성들의 생업 안정에도 힘썼습니다. 이는 국가 경제력 회복과 병력 자원의 안정적 확보에도 기여한 조치였습니다.
후계자 문제와 사망
원성왕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모두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결국 장남 김인겸의 아들인 손자 김준옹이 태자로 책봉, 뒤를 이어 소성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799년 2월 12일, 원성왕은 붕어합니다. 『삼국사기』에는 유언에 따라 화장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경주 숭복사비에서는 그의 유해가 산에 안장되었다고 전하고 있어 정확한 장례 방식은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의 능은 **경주 괘릉(掛陵)**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신라 중흥기의 상징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묘호 '열조'의 발견: 후대의 재평가
원성왕은 오랫동안 시호만 전해졌지만, 2015년 경주 숭복사 터에서 출토된 최치원 비문을 통해 후대에 그에게 '열조(烈祖)'라는 묘호가 올려졌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원성왕은 단순한 시호만을 가진 왕이 아닌, 묘호까지 부여된 신라의 중요한 군주로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하대를 연 명군, 원성왕
원성왕은 정치 혼란기를 극복하고, 유교적 이념을 통한 새로운 통치 질서를 마련한 명군으로 평가받습니다. 독서삼품과의 시행은 인재 선발의 기준을 마련하고, 왕실 중심의 정치 구조 재편은 왕권의 안정에 기여했으며, 민생을 위한 실질적 정책들은 국민 신뢰를 쌓는 데 효과적이었습니다.
그의 통치는 신라 하대의 첫 시작을 안정적으로 이끈 모범적인 사례로, 오늘날까지도 정치적 리더십과 개혁 의지의 상징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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